[나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 2014.04.22 #05
16년전의 일이지만 떠올릴때마다 낯 뜨거운 기억이 있다.
98년 청년회장시절에 청년부의 활성화를 위해 주일에 청년들이 마땅히 있을 장소가 없어 언제라도 와서 교제하고 쉴 수 있도록 교회의 사용하지 않던 한 공간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탁자와 소파를 가져다가 청년부 전용 공간을 꾸며놓았다.
그날은 아마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 중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내가 그 날을 기억하는 것은 내 마음에 꺼려지는 것이 있어 스스로 성찬의식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1시 예배전, 나부터 모범을 보이기 위해 청년부의 전용공간에 가있었다. 나 혼자 있었고 아마도 성경을 읽고 있었거나 졸고 있었을 것 같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초등부 선생님이 분반공부를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오셨다.
98년도에는 초등부 예배를 마친 후 본당의 곳곳에서 무리를 지어 분반공부를 진행하곤 했었는데,
새로운 공간이 생겼으니 여기를 생각하고 온 것은 당연한 일일 수 도 있다.
그런데 나의 마음에는 순간적으로 위기감이 느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물러나면 청년들이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는 전용공간을 마련한 의미가 와해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다.
그래서, 나는 그 선생님께 이 공간은 청년부가 사용하기 위해 마련된 전용공간이니 이 곳을 내줄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
그 선생님은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이다. 넓은 공간에 한명의 청년이 있는데, 그것도 특별히 어떤 모임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아이들을 우루루 데리고 왔는데 그 공간을 사용할 수 없다고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었으니 참 어이가 없었을 것 같다.
나의 기억이 희미하여 그때 내가 그 공간에서 계속 버텨서 그 선생님과 학생들이 다른 곳으로 갔는지, 내가 그 장소를 분반공부를 위해 내어 주었는지 잘 나지 않는다.
1시간 후면 11시 예배였는데 나는 마음의 평정심이 깨져서 결국 그날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를 건너뛸 수 밖에 없었다.
청년부의 전용공간으로 사용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일지라도 선생님과 아이들이 함께 왔기 때문에 일단 그날은 분반모임에 사용하도록 하고,나중에 별도로 그 선생님과 만나서 청년부 전용공간 사용에 대한 협의와 양해를 구했으면 참 지혜로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물러나면 안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지혜롭지 못한 열심이 나로 하여금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하였다.
이 일은 그 이후 나로하여금 부끄러운 마음과 겸허해질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기억이 되고 있다.
그 때 그 선생님은 아직도 우리 교회에 계신다. 또한 여전히 그 선생님을 볼때마다 부끄러운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떠올리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단점을 보는 것을 매우 잘한다. 눈에 보인다. 왜냐하면 매우 높은 행동기준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직도 나는 예배시간에 다른 사람들의 예배 모습에 마음이 불편해질 때가 많다.
나의 견지에서는 '명색이 하나님 앞에 시간인데 어떻게 저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지?'라는 그런 생각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런 생각을 하면 내 마음이 강퍅해진다. 그래서, 나는 앞에서 설교하는 분에게 시야를 좁혀버리거나 눈을 감는다.
그것이 나의 작은 믿음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학생들의 예배에 대한 태도들을 보면서도 유사한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런데, 그때 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또는 그들의 모습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통해,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게 된다.
나는 타인의 모습에 대하여 비판적인 모습을 하면서, 나 또한 다른 영역에서는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대놓고 이러쿵 저러쿵 말을 못한다. 그게 내 모습이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모습에 대하여 '어떻게 저럴 수 있느냐? 저러면 안되지.'라고 용감하고 정의롭게 말하지만, 나는 그들이 그러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내 모습이니까. 나도 그러고 있으니까, 약간의 형태는 다르지만 나도 그러고 있으니까, 그 사람의 위치에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그를 있는 모습대로 보고, 나의 할 것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정리하곤 한다.
내 스스로 그 사람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옳고 그름을 떠나 내 마음이 먼저 깨지고 내 안에 은혜가 차지 않고 다른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그래서는 나를 통해 하나님의 평안함도, 능력도, 사랑도 그 어떤 것도 흘러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정작 내가 해야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비판하느라 나의 마음을 깨고 남의 마음을 깨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는 것도 아니고 맡겨주신 소명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험상 정의로와지려고 노력하고 열심히 하려면 할 수록 작은 것에도 나의 마음은 강퍅해졌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생각하는대로 일이 진행되면 본전이지만 내가 생각하던 대로 내가 원하던 대로 되지 않으면 그것이 나에게 올무가 되고 걸림돌이 되어 나를 구렁텅이에 빠뜨리게 했다. 내 스스로 나를 넘어뜨린 형국이 된 것이다.
이런 사람이나 저런 사람이나 그들을 보면서 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나의 행동방식들을 점검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매우 원망스러울 때도 있고, 뭔가 내가 원하는대로 하면 잘 될 것 같은데 하는 나만의 바램이나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생각일 뿐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나의 생각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이 나를 잠잠하게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체력이나 지적인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예전에 행하던 못된 행동들이나 어리석은 행동들을 반복해서 하곤 한다.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성경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예전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지고 믿어진다는 것이다.
평안할 때는 성경과 신앙을 이론적으로만 익히던 것을 이제는 삶에서 적용하면서 확인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배운 것을 시험 치르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러다 보니까 맘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예전과 같지 않고 더 가깝게 다가온다.
힘든 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더 가까이 옴을 느낀다. 그래도, '결론은 버킹검'이라고 나는 평안한 것이 좋다.
'굳이 평안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나? '하는 안이한 생각을 하곤 했었지만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남들은 다들 하고 있던 신앙의 기본적인 것들을 나는 이제서야 조금씩 알아간다. 그럼에도 그동안 마음속으로 잘난 체 하고 끈임없이 비판하고 그러던 모습이 부끄러울 뿐이다.
물론, 앞으로도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을 때마다 부끄러워 할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이다. 나는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어리석은 일과 미련한 일을 할 것이지만, 그 모든 것을 덮으시고 해결하여주시는 예수님이 있으시기 때문에 너무도 다행스럽게 감사한 일이다.
이것이 내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것을 얼마전에 마음에 깨달았다.
사람들을 보며 나 자신을 보며 예수님이 필요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비난과 죄악과 후회가 더욱 거세질수록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영역에서 맡겨주신 것을 성실하고 겸허하게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이것이 나에게는 숙제이다.
이 숙제가 나를 누르기도 하지만 겸허해 질 수 있는 도구가 된다.
그래서 이 말을 하면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늘 핀잔을 난을 받곤 하지만 '나는 오늘 부터 새롭게 시작할 거야'라는 말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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