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공지영 씨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창립 3주년 토크콘서트'가 열린지 하루 만인 4월 29일, 똑같은 장소인 서울 가톨릭청년회관 CY씨어터에서 소설가 공지영 씨를 다시 만났다. <지금여기> 토크콘서트에 이야기 손님으로 나섰던 그는, 이번에는 한국 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이하 장상협의회)가 주최하는 ‘2012년 수도자와 함께하는 갈릴래아 축제’에 강사로 초청됐다. 그는 ‘가톨릭과 나’라는 주제로 말하고자 한다며 운을 뗐다.
스스로 ‘공지영 마리아’라고 소개한 작가는 요즘 신앙심이 조금 생겼느냐고 묻는 어느 신부에게 “(내게) 신앙심이 얼마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대신 하느님과 좀 친하게 지낸다”고 대답했다며 “저와 가장 친한 분은 하느님인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만약 내가 하느님을 몰랐다면, 그리스도를 몰랐다면, 가톨릭에서 교육받지 않았다면 내 삶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작가는 ‘십자가의 길’ 12처 기도문의 “혹시라도 영원히 주님을 떠날 불행이 저희에게 닥칠 양이면 차라리 지금 주님과 함께 죽는 행복을 내려주소서” 하는 구절을 인용했다. 그는 언젠가 십자가의 길 기도에 참여하며 “그 기도문에 진심으로 동의”한다고 느꼈다. “나는 넘어지면 일어날 수 없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갈 수도 없지만, 하느님 없이 살아가라고 하면 기꺼이 지금 죽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느님, 왜 나를 사랑하세요?”...
“그것은 네가 하도 속을 썩여서”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이 “신과의 싸움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 했다.
저처럼 하느님께 온갖 버릇없는 말을 다 했던 사람도 드물 거예요. 한번은 기도하며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어요. “하느님, 왜 나를 사랑하세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는데 제 마음 속에서 이런 대답이 들려왔어요. “그것은 네가 하도 속을 썩여서다.” 그때는 의아했는데 나중에 제가 아이들을 키워보니까 저도 속 썩이는 아이에게 손이 많이 가고 늘 그 아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그 애를 제일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작가는 개신교계 초등학교에 다니며 그리스도교 교리와 성경에 관해 배웠고, 중학교 1학년 때 “자연스럽게 집 앞의 성당으로” 이끌려 세례를 받고 견진성사도 받았다. 대학 2학년 때까지 포콜라레 운동에 참여하는 등 천주교에서 열심히 활동했던 그는, 당시 여의도성당에서 일요일마다 중·고등부 학생들과 함께 영등포, 구로, 안양 등지의 “지금은 거의 사라진 끔찍한 빈민촌”을 찾아가 위문품을 전달하고, 노인들에게 봉사했던 일을 회상했다. 그때마다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여의도와 빈민촌의 참상을 비교하며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 경험이 대학 시절 그를 운동권으로 이끈 동기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 다시는 ‘내 탓’이라고 하지 않겠어.
그는 1980년대 스물두 살에 교회를 떠났다가 마흔 살에 돌아왔다. 성당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호경 빼고는 다 잊어버렸다. 그는 “하느님을 떠났던 것은 아니지만 교회가 너무 싫었다”고 말한다.
대학생 시절, 시위에 참여했다가 최루탄을 피해 명동성당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마침 꼭 ‘전도’하고 싶었던 친구 두 명도 함께였다. 피신을 겸해 미사에 참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미사를 주례한 사제는 성당 신축기금 이야기를 장황하게 했고 투덜거리던 친구들은 담배를 피우러 나가버렸다. 작가는 너무 화가 나서 미사가 끝나기도 전에 성당을 나서며 “이제 다시는 ‘내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자신이 품었던 “아주 당돌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 때 한창 ‘내탓이오 운동’이 벌어졌는데, 제가 속으로 생각했죠. 나는 이제 다시는 ‘내 탓’이라고 하지 않겠어. 내 탓이 뭐가 있어서 우리나라가 이렇게 됐다는 말이야? 당신들 신부, 주교, 추기경, 우리 보고 ‘내 탓’이라 여기라 하지 말고, 당신들이 청와대, 국회에 가서 손가락을 똑바로 들고 정치인들 향해 ‘네 탓’이라고 말하면 나는 그 때 정말 ‘내 탓’이라고 말하겠다. 이런 아주 당돌한 마음을 품고 제가 성당을 나와서 18년 동안 방황을 했어요.
“마리아, 너는 여기 왜 왔어? 너는 왜 믿어?”
그는 그 18년이 ‘방황’만은 아니었고 “나름대로 재밌게 살았는데 어쩌다 보니 다시 돌아오게 됐다”며 동료 작가들과 어울려 드나들었던 수많은 점집과 온갖 종교를 소개해 청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언젠가 독일에서 열린 성령세미나에 참가했을 때의 일화도 소개했다. 저녁에 신자들이 모여 성령세미나 중에 일어난 온갖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자, 작가는 '그런 기적은 내가 만나본 무당들이 벌이는 신기한 일과 다를 바 없다'는 식으로 말해 찬물을 끼얹었다. 그가 ‘바리사이 자매’라고 부르는 신앙심 깊은 여성 신자들이 듣다못해 화를 내며 물었다.
“그럼 마리아, 너는 여기 왜 왔어? 너는 왜 믿어?”
작가는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저는 무당도 봤고,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도 봤지만, 저를 위해서 죽은 신은 예수님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믿어요.”
그는 평소 생각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바리사이 자매'에게 던지고 나서, "내가 이렇게 좋은 말을 하다니 정말 성령을 받았구나" 생각했다며 이후에도 무심코 꺼냈던 그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왜 교회는 저 흉측한 처형 광경을 매달아놓는가?
한편 공지영 작가는 교회가 갓 태어난 예수님이나 설교하시는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아닌, 십자가처럼 흉측한 처형 광경을 매달아놓고 신자들이 바라보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했다.
작가는 그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저 십자가의 길이 영생의 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저렇게 되라’는 말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작가가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됐다. 그는 소설 <도가니>를 쓰는데 참고하기 위해 보았던 그리스도교계 방송에서 ‘십자가’, ‘희생’, ‘보속’ 같은 말은 찾아볼 수 없고 ‘쳐 이기다’, ‘쳐부수다’, ‘복을 주시다’, ‘재산이 불어나다’ 같은 말만 난무했다고 꼬집었다.
그는 돈 내고 절하면 예외 없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신들’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비교하기도 했다. 점집을 예로 들었지만 무속신앙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기도를 선별해서 들어주기도 하고 안 들어주기도 하는 신이 진짜다.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절하고 돈 많이 내면 소원을 들어주는 신에 대한 관념이 많았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 신이 가짜 신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잡신’들이 있다고 보는데, 그들은 우리 자신은 변하지 않은 채 그저 자기를 무조건 숭배하고 돈을 내기를 원하는 거예요. 저런 신을 믿다니 너무 자존심이 상했고, 웬만하면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하느님이 더 센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농담이고요. 물론 약간의 진실도 있습니다."
사형수들과 만나며...“죄가 많은 그곳에 은총이 충만하다”
그는 18년 만에 하느님을 다시 만난 데 이어 2004년 9월부터 사형수들을 만나기 시작하며 두 번째 변화를 겪었고 신앙이 얼개를 갖추게 됐다고 한다. 처음에는 소설을 쓰기 위해 구치소 측의 배려로 시작된 만남이었지만 이제는 상담봉사자가 되어 9년째 사형수와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그가 만난 사형수는 많은 경우 여러 사람을 죽인 흉악범인데다, 애절한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직폭력배였거나 돈이나 증거인멸을 위해 살인을 저지른 경우가 많았다.
작가가 만난 사형수들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았고 거짓말도 많이 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달라지고 있었다. 사형수와의 만남을 다룬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출간 이후 7년이 흐르는 동안 그들은 너무나 많이 변했다. 작가는 삶의 모든 것이 부숴져버린 사형수가 봉사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새로 태어나 봉쇄수도원의 수도자 같은 놀라운 신앙을 갖게 되는 모습을 “엄청난 부활의 현장”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지금도 교도소를 방문할 때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로마 5,20)하다는 성경 말씀이 비유만이 아니라고 느낀다. 이 ‘놀라운 부활’의 현장을 겪으며 그는 ‘사람이 사랑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의 사회 참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불행한 이웃 돌보기’
작가는 메모지에 적은 참가자들의 질문을 골라 대답하는데 30분 정도를 할애했다. 성소주일에 장상협의회가 주최한 행사인 만큼 천주교 수도생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도 두 차례나 나왔다. 그는 “다음에 쓸 소설이 수도자가 주인공인 소설”이라서 “수사님들 취재도 많이 했다”며 “한 번뿐인 인생을 멋지게 사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진리를 알고, 체험하고, 구현하겠다는 그 젊은 분들이 멋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당연히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민해 본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이웃이 울고 있는 것을 보면 음식이 맛있게 넘어가지 않을 정도의 양심은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며 “교회의 사회 참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불행한 이웃 돌보기”라고 표현했고, 이어 “추기경님이 하면 교회의 사회 참여이고 우리가 하면 교회의 사회 참여가 아닌 것이냐?”고 되물었다.
그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 차려진 쌍용자동차 희생 노동자 분향소를 언급하며 “정말 못 떠나겠다. 그 얼굴이 너무 절망스럽고 또 죽게 생겼는데, 그래도 제가 가서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면 사람들이 화색이 돈다”고 말했다. 이어 글 쓰는 재능과 건강한 신체, 좋은 부모님 등 “제가 받은 게 너무 많다”며 “많이 받은 이유는 나눠 쓰라는 뜻인 것 같다”고 했다.
▲ 공지영 작가가 참가자들이 쪽지에 적어 낸 질문에 답하고 있다.
작가는 강의가 끝난 뒤에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행사장에 남았다. 갈릴래아 축제에 참여한 남자수도회의 홍보 부스가 차려진 카페에 앉아 수도자나 젊은이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기념사진을 찍는 그의 모습이 보였고, 장상협의회 회장 남상헌 신부가 주례한 미사 때는 뒷자리에 앉아 기도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수도자가 주인공이라는 다음 소설에서 공지영 작가가 이번 축제에서 만난 수도자, 젊은이들의 모습을 어떻게 녹여낼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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